개화산 봉수대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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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개화산 둘레길을 걷다가 보면 지나가는 곳에 봉수대가 있습니다.

개화산은 한국전쟁, 임지왜란 등 역사를 통해 지리적, 군사적으로 매우 주요한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둘레길에 위치한 개화산 봉수대 안내표지판을 정독해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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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산 봉수대

강서구의 유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개화산 봉수대는 현재 여기로부터 약 250여미터 떨어진 육군 제9175부대 인근에 봉수대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1994년 11월 설치)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에 강서구에서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임을 알리기 위해 이 곳에 원형 복원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2013년 11월 개화산 봉수대 모형을 설치(높이 2m, 둘레 4m)하였다.

개화산 봉수대는 서해로 빠지는 한강서부와 서울을 잇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조선시대의 봉수대로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1530년)」에 따르면,

"개화산 봉수는 동쪽으로 남산제5봉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김포현 북성산과 응한다."라 하여 봉수가 있었음을 전한다.

더구나 한강 건너 행주산성이 있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만일 남해안에 왜구가 쳐들어온다면 전남 순천에서 봉화가 시작되어 서해안과
강화도를 거쳐 김포에 봉화가 올라오면 이 곳 개화산에서 남산(목멱산) 제5봉수대로 신호를 보내게 되며,

그 정보는 병조에 종합 보고되고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봉수는 전쟁 상황에 따라 5번을 올리는데 이상이 없는 평상시에는 1, 적이 나타나면 2 , 경계에 접근하면 3, 경계를 침범하면 4 , 접전 중이면 5홰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불이나 연기로 신호를 보내어 국가의 긴급한 상황을 알리던 봉수제도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달하였다. 이후 전신, 전화 등의 근대적인 통신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1894년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출처 : 봉수대 안내표지판]

평소 우연히 지나치던 길에 위치한 역사적 터나 조형물에 대해 역사적 배경을 알고나니 무언가 여운이 남아있네요.

20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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